■ 출판사 서평
이 책은 그간 발표했던 조선 왕실의 상장례에 대해 쓴 글들을 대폭 수정하고 보완하여 묶은 것이다. 18세기에 죽음을 맞이한 영조, 문효세자, 의소세손을 다루었다. 왕실의 구성원 중 남자를 중심으로 하되 국왕, 국왕의 뒤를 이을 국본세자, 그리고 그들의 손자이자 아들인 세손을 차례로 정리했다. 조선 왕실의 상장례는 ‘효’라는 유학의 핵심 키워드를 강조한다.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왕실은 사대부와 일반 백성들의 가정의 표본이었다. 왕실의 구성원들이 살아 있을 때‚ 그들이 죽었을 때‚ 죽고 난 다음에 행하는 행위들은 곧 이들에게 쫓아야 할 대상이었다. 그 때문에 왕실의 상장례는 위정자(爲政者)들의 입장에서 ‘효’를 근간으로 하되 개인의 심성 수양‚ 사회의 구성원 혹은 국가의 백성으로서 가지는 집단의 결속성 등 ‘효’ 이상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조선은 모든 질서를 ‘예(禮)’에 따라 차등적으로 구분 짓는 유교 국가이기에 국왕을 비롯하여 세자, 세손의 상장 과정을 함께 살피는 것은 처음 시도되는 만큼 의미 있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책의 내용은 생생한 현장감을 배가시킬 사진과 채색 그림을 곁들여 이해를 돕는데 많은 노력을 하였다. 다양한 직업과 계층‚ 사회적·경제적·문화적 현상의 빠른 변화에 익숙한 현대인들이 전통시대 사람들의 의식과 절차를 학습하며 과거와 현재, 미래의 변화를 생각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 저자소개
이현진-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연구교수.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한림대 부설 태동고전연구소 과정을 이수했다. 서울대, 동덕여대, 건국대 등에서 강의했으며,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을 역임했다. 저서로 『조선후기 종묘 전례 연구』, 『왕의 죽음, 정조의 국장』이 있고, 공저로 『종묘와 사직』, 『한양의 탄생』, 『왕의 행차: 조선후기 국왕의 융릉·건릉 행행(行幸)과 의례』, 『궁방양안(宮房量案)』, 『영·정조대문예중흥기의 학술과 사상』, 『조선의 국가 제사』, 『조선 국왕의 일생』 등이 있다. 주요 논문으로 「조선시대 奉常寺의 설치와 기능, 그 위상」, 「고종대 경복궁 중건에 참여한 別看役의 성격」, 「대한제국의 선포와 종묘 제도의 변화: 七廟의 구성과 황제 추존, 신주 改題를 중심으로」, 「조선시대 종묘의 부묘 의례와 성격」 등이 있다.
■ 책속에서
서론(p17~19) 생명이 다하여 죽은 이를 떠나보내는 상장(喪葬) 의례는 언제 어디서나 중요한 문제였다. 동아시아 사회에서 시행된 유교적 상장 의례는 중국에서 제정되어 주변의 베트남과 조선 등지로 퍼져나갔다. 최고 지배층의 상장 의례의 경우‚ 중국은 당나라 이후 명나라에서 『대명집례(大明集禮)』가 편찬될 때까지 황실의 국장 과정이 전하지 않고‚ 한국에서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고려에서 왕실의 국휼(國恤)에 관한 의식을 제정하지 않았다. 중국‚ 고려와 달리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국가 의례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제도를 참조하여 왕실의 흉례‚ 국장(國葬)에 대한 규정을 정비했다. 특히 조선후기에는 관찬 자료와 국가전례서 및 의궤·등록(謄錄)에 상장 의례와 그 실천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조선 사회는 유교 국가였고 유교문화권에서는 모든 질서를 ‘예(禮)’에 따라 차등적으로 구분지었다. 그에 따라 중국의 제후국을 자처했던 조선은 건국 초 국가 예제를 정비하면서 천자국 중국보다 한 등급 낮추는 방향으로 모든 예제를 규정지었다. 국가만이 아니라 조선 내부에서도 이러한 구분은 법전과 국가전례서에 성문화했고, 이는 특히 상장례에서 뚜렷하게 드러났다. 우선 ‘죽었다’는 표현부터 지위에 따라 다르게 규정했다. 『예기』에 ‘천자는 붕(崩)‚ 제후는 훙(薨)‚ 대부는 졸(卒)‚ 사(士)는 불록(不祿)‚ 서민은 사(死)’라고 한 기록이 그것이다. 조선의 국왕은 제후에 해당하므로 그의 죽음을 ‘훙’으로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고‚ 자료에는 대개 ‘훙’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밖에 ‘승하(昇遐)’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고‚ 간혹 ‘훙서(薨逝)’를 쓰기도 했다. 훙서는 그 밖에 효장세자(孝章世子)나 현빈(賢嬪) 등 세자나 세자빈의 죽음에 사용되기도 했다. 이 점은 상장례에서 사용하는 그 밖의 단어에서도 잘 드러났다. 조선시대 국왕과 왕후의 장례를 ‘나라의 장례’라는 뜻으로 ‘국장(國葬)’‚ 세자나 세자빈은 한 등급 낮추어 ‘예장(禮葬)’‚ 세손과 그 밖의 후궁[정1품]‚ 대원군 역시 모두 ‘예장’이라 일컬었다. 그리고 국왕의 상을 ‘대상(大喪)’‚ 왕후의 상을 ‘내상(內喪)’‚ 세자의 상을 ‘소상(小喪)’‚ 세자빈의 상을 ‘소내상(小內喪)’이라 하여 구별지었다. 국왕은 국장·대상‚ 왕후는 국장·내상‚ 세자는 예장·소상‚ 세자빈은 예장·소내상‚ 세손은 예장·소상에 해당했다. 그 밖에 국장과 예장의 구별은 ‘국장도감의궤(國葬都監儀軌)/예장도감의궤(禮葬都監儀軌)’‚ ‘빈전도감의궤(殯殿都監儀軌)/빈궁도감의궤(殯宮都監儀軌)’‚ ‘혼전도감의궤(魂殿都監儀軌)/혼궁도감의궤(魂宮都監儀軌)’‚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묘소도감의궤(墓所都監儀軌)’ 등 흉례 관련 의궤의 서명(書名)에서 가장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정조 초에 거행한 영조의 국장과 정조의 첫째 아들 문효세자(文孝世子)의 상장을 비교해 보면‚ 국장/예장‚ 빈전(殯殿)/빈궁(殯宮)‚ 혼전(魂殿)/혼궁(魂宮)‚ 산릉(山陵)/묘소(墓所)‚ 찬궁(欑宮)/찬실(欑室)‚ 재궁(梓宮)/재실(梓室), 현궁(玄宮)/현실(玄室)‚ 능상각(陵上閣)/묘상각(墓上閣)‚ 부묘(祔廟)/입묘(入廟) 등등 여러 부면에서 용어가 명확하게 대별됨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국장과 예장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은 사례도 있다. 1789년(정조 13) 양주 배봉산(拜峯山)에 있던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무덤인 영우원(永祐園)을 수원 화산(花山)에 있는 현륭원(顯隆園)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1815년(순조 15) 12월 15일부터 1818 년 2월 4일까지 진행된 혜경궁의 상장례에서 볼 수 있다. 두 경우는 국장과 예장에서 사용하는 단어를 섞어서 쓴다든가 예장에서 사용할 수 없는 찬궁을 설치하고 그 안에 사수(四獸)를 그리는 등 문헌에 드러난 각종 용어와 도설(圖說)에서 국장과 예장의 구별이 분명하지 않았다. 이는 조선 전시기 동안 극히 예외적인 경우였고‚ 일반적으로는 국장과 예장을 엄격하게 구분지었다. 일반적으로 조선 왕실의 ‘상장례’라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국왕과 왕후의 국장일 것이다. 국왕과 왕후의 국장 과정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나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등 국가전례서를 비롯하여, 국장·빈전·혼전·산릉·부묘 등 흉례 관련 의궤에 잘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더해 『국휼등록(國恤謄錄)』과 『혼전일기(魂殿日記)』·『왕릉일기(王陵日記)』 등이 남아 있어서 자료면에서 풍부하다고 볼 수 있다.
■ 목차
머리말 005
서론 017
제1장 왕실 흉례 절차의 정비 031 제1절 조선 초 국왕과 왕후의 흉례 절차 033 제2절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흉례 절차 041 제3절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의 흉례 절차 047
제2장 국왕의 국장(國葬) - 영조(英祖) 057 제1절 『국조상례보편』의 국장 규정 059 제2절 국장 절차 062 1. 승하(昇遐) - 대렴(大歛) 062 2. 성빈(成殯) - 발인(發靷) 072 3. 발인(發靷) - 입주전(立主奠) 087 4. 반우(返虞) - 부묘(祔廟) 100 제3절 영조 국장의 특징 121
제3장 세자의 예장(禮葬) - 문효세자(文孝世子) 141 제1절 법전과 국가전례서의 예장 규정 143 제2절 예장 절차 149 1. 훙서(薨逝) - 대렴 149 2. 성빈 - 발인 154 3. 발인 - 입주전 181 4. 반우 - 입묘(入廟) 206 제3절 문효세자 예장의 특징 219
제4장 세손의 예장(禮葬) - 의소세손(懿昭世孫) 239 제1절 세손 예장에 대한 수교(受敎) 규정 241 제2절 예장 절차 246 1. 훙서 - 대렴 246 2. 성빈 - 발인 256 3. 발인 - 입주전 273 4. 반우 - 입묘 293 제3절 의소세손 예장의 특징 303
결론 왕실 상장례의 특징과 연구 과제 321
주 337 참고문헌 391 찾아보기 398
■ 머리말
상장례(喪葬禮)는 신분적 위계가 뚜렷한 조선시대에 왕실에서 행한 가장 어렵고 까다로운 의례 중 하나다. 죽기 직전부터 혼(魂)이 깃든 신주를 사당에 봉안하기까지 3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엄숙하고 장엄한 분위기 속에서 수많은 의례를 진행해야 하는 힘든 과정이다. 조선의 왕실에는 국왕, 왕후, 세자, 세자빈, 세손 등 위계와 신분이 다른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의 죽음을 기록한 자료는 사대부나 일반 사람들에 비해 풍부하다. 그중 의궤는 시각적 효과까지 제공하여 좀 더 생생하게 그 과정을 보여준다. 그런데 의궤 중에서 국왕이 아닌 다른 왕실 구성원의 죽음을 기록할 경우 서명에서부터 다른 단어를 사용하여 궁금증을 자아낸다. 신분의 구별이 뚜렷한 조선시대에 여타의 왕실 구성원들은 어떻게 상장례를 치렀을까 하는 의문이다. 이 책은 그중 18세기에 죽음을 맞이한 영조, 문효세자, 의소세손을 다루었다. 왕실의 구성원 중 남자를 중심으로 하되 국왕, 국왕의 뒤를 이을 국본 세자, 그리고 그들의 손자이자 아들인 세손을 차례로 정리했다. 조선은 모든 질서를 ‘예(禮)’에 따라 차등적으로 구분짓는 유교 국가이기에 국왕을 비롯하여 세자, 세손의 상장 과정을 함께 살피는 것은 처음 시도되는 만큼 의미있는 작업이라 판단했다. 이들이 죽는 순간부터 상장례를 모두 마치기까지 절차는 어떠하며, 어떤 절차에서 차이를 보이며, 어떠한 용어를 사용하고, 공통점은 무엇이며 차이점은 무엇인지 등을 밝히는 것이 이 책을 집필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다. 여기에 생생한 현장감을 배가시킬 사진과 채색 그림을 곁들여 이해 를 돕는 것은 물론이다. 이 책은 그간 발표했던 조선 왕실의 상장례에 대해 쓴 글들을 대폭 수정하고 보완하여 묶은 것이다. 각 인물마다 3년간 진행된 의식 절차를 망라하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대부분 사어화(死語化)된 어려운 단어를 풀어쓰고, 심지어 이해를 돕기 위해 삽입한 사진과 수많은 그림에 대한 설명은 그간 출간한 저서들과는 또 다른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럼에도 막상 책으로 엮고 보니 다음 연구를 위한 바탕이 된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다. 조선 왕실의 역사와 문화, 의례를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이 책은 박사 논문을 저서로 출간한 「조선후기 종묘 전례 연구」, 정조의 국장을 다룬 「왕의 죽음, 정조의 국장」을 이은 필자의 세 번째 저서이다. 오랜 시간 탈고를 기다려주고 신구문화사에 출판을 의뢰해준 역사문화연구소 유봉학 소장님께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앞선다. 그리고 책 기획부터 출간까지 조언을 아끼지 않고 도와준 역사문화연구소 연구부장 정재훈 선생님과 정해득 선생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도판과 도표가 많아서 편집이 힘들었을텐데 이쁘게 만들어준 신구문화사 최승복 편집부장님의 열정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아울러 신구문화사 식구들에게도 깊이 감사드린다. 시간을 연구하는 데 익숙한 필자가 의례 공간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서울학연구소에 있을 때 집필한 것이라 감회가 남다르다. 의례 공간에 대한 관심을 본서에 반영하도록 도와준 이혜원 선생님과 박희용 선생님께도 고맙고 감사하다. 도판을 제공해 준 전혜원 선생님과 김민규 선생님, 도판을 활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준 여러 기관의 고마움 또한 잊을 수 없다. 충분한 교정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해준 서울학연구소 이익주 소장님, 오랫동안 건강을 책임져준 김동일 원장님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지금까지 공부할 수 있었던 데에는 가족의 지원과 격려가 가장 큰 힘이 되었다. 언제나 믿고 응원해준 부모님, 교통사고로 오랫동안 병원에 계신 어머니를 헌신적으로 봉양하는 오빠와 올케언니에게 가장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2017년 1월 서울학연구소 연구실에서 이현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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