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판사 서평
추사 김정희의 독서 이력은 19세기 중반 동북아시아 삼국 학술계의 확장을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기록물이다. 그는 경학 13경 분야뿐 아니라 천문학·산학, 음운학, 지리학, 교감학 등 방대한 분야에서 동북아시아 최신의 그리고 최대의 학술 정보를 보유하려고 힘썼던 바 중화 학계의 최전선에 있던 학자이자 한·중·일 학술 협력·공동 연구의 선봉장이었다. 본서는『완당선생전집』으로부터 새로 발굴한 26종의 청대 학술 자료를 비롯해 방대한 동북아시아 학술 자료를 통해 근대 이전 한중일 학술 교류의 성대했던 마지막 장면을 재조명했다.
■ 저자소개
정혜린
서울대학교 미학과에서 「김정희 예술론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성균관대학교 인문학연구원에서 연구교수로 근무하고, U. C. Berkely에서 객원교수 자격으로 방문하였다. 서울대학교, 홍익대학교, 성균관대학교 등에서 강의하고 조선과 중국의 예술론, 사상,역사를 연구해왔다. 저술로는 『추사 김정희의 예술론』, 「조선 중기 회화관 연구: 절파 산수화와 시화합일의 관계를 중심으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청대(淸代) 서파(書派) 수용과 절충」, 「옹방강(翁方綱)의 서예사론(書藝史論)」, 「『임천고치』(林泉高致)가 유가를 구현하는 방식」 등이 있고, 『중국 고대 서예론 선역』을 공역하였다.
■ 책속에서
1. 한중일 학술 교류사와 김정희
소중화(小中華), 동도서기(東道西器), 모노크롬, K-POP. 이 어휘들은 역사상 긴 시간의 간격을 두고 등장했지만 동일한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외래 문화의 수용과 자기화가 그것이다. 문화가 국내 혹은 국외로 이동하면서 변화·성장하는 과정을 크게 원본 (혹은 원류)와 이에 대한 재가공 (혹은 성숙·심화)로 나누자면 위의 현상들은 후자 쪽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혹 원래의 것, 순수주의, 일차적 창조에 지나치게 가치를 둘 경우 후자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에 대해 문화사대주의라는 관념을 떠올리면서 자괴감을 느낄 수도 있고, 내재적 발전론처럼 얼핏 감성적으로는 이 자괴감과 정반대의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동일한 가치관에서 도출된 논리를 전개할 수도 있다. 이러한 편향된 시각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들도 꾸준히 진행되어 왔다. 문화 사대주의, 내재적 발전론 외에 이들 논의의 기저에서 작동하는 유럽식 근대주의, 민족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 지속되는가하면 20세기 이전 동북아시아 문화권 내의 문화 이동을 새로운 시각에서 설명하는 노력도 학계에서 힘을 얻고 있다.1) 특히 동북아시아 문화권 내 문물의 유통과 학자 간 교류와 관련하여 문화의 중심에서 주변부로의 일방적 전달이 아닌 상호 소통과 협력의 측면을 발굴하는 연구 경향은 내재적 발전론 류의 논의에 대한 대안으로 성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연행사(燕行使)와2) 통신사(通信使), 삼국의 문예 및 고증학의 교류, 개별 학자 간의 교류에 대한 연구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19세기까지 동북아시아 문화 생태학의 구체적인 면모들이 차차 드러나고 있다.3
■ 머리말
김정희의 독서 이력은 19세기 중반 동북아시아 학술사를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기록물이다. 현재 『완당선생전집』(阮堂先生全集) 내 논설류와 잡문[雜識]으로 분류된 바 방대한 청나라의 학술 문헌과 학자들에 대한 기록은 18세기 후반에 비로소 조·청 학자 간 개인 교류가 가능해지고 학술 자료를 시장에서 자유롭게 구입하는 것이 가능해진 시대적 상황을 증언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가 청의 학자들과 학술 정보와 관점·방법론을 주고받은 학술 대화와 기타 교류의 흔적들은 그 자체 위에서 언급한 중화문화권 학술계의 큰 변화를 만들어 가던 발자취이다. 이렇게 학술 자료에 대한 탐색 영역이 중원으로부터 조선, 일본으로 확장됨에 따라 세 국가 학자들의 협력이 필수적이게 되었고, 이에 하나의 문화권 내 학술 정보의 이동이 중심지에서 주변으로의 일방적인 학술 전달에 그치지 않고 국제적 학술 교류와 협력의 장이 생성되었다. 김정희는 경학(經學) 십삼경(十三經)의 분야뿐 아니라 천문학·산학(算學), 음운학, 지리학, 교감학 등 방대한 분야에서 동북아시아 최신의 그리고 최대의 학술 정보를 보유하려고 힘썼던 중화 학계의 최전선에 있었던 학자이자 이를 국내외 학자들에게 소개한 바 한·중·일 학술 교류의 주역이었던 셈이다. 본서가 『완당선생전집』에서 새로 발견한 26종의 중국 학술 자료는 그의 지적 범위와 깊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김정희의 학문적 시계(視界)는 일본 경학계까지 뻗어나간다. 그가 청의 학자 왕희손(汪喜孫)에게 보낸 서간문이 청의 학계에 대한 김정희의 학술 정보의 양과 질을 가늠케 하는 핵심 자료라면, 「회인시체를 방하여 이전에 들은 것을 서술하여 일본 배에 부치니, 오사카 여러 명사들 중 이해하여 줄 이가 당연히 있으리라」라는 긴 제목의 10수 연작시와 단 하나 남은 근대 일본 문화사에 대한 정리문은 일본 학계에 대한 그의 학술 정보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 자료들이다. 김정희는 동시대 일본의 고증학파를 특히 주목하고 그들의 학술 업적에 관해서라면 조선에서 가장 최신의 정보를 갖추고 있었다. 아마도 그 정보들은 통신사단에 참가한 이력을 지닌 그의 지인들 외에 청의 학자들로부터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얻은 정보를 김정희는 청의 학자들과 공유했다. 중국에서는 이미 사라지고 일본에만 보존된 수·당대 경전들이 수록된 『칠경맹자고문보유』(七經孟子考文補遺) 원본도 김정희를 통해 청의 학계에 전달되었다. 물론 일본도 조선과 청의 학술계의 정보를 입수하고자 노력했고 또 자신들의 학술 정보를 조선과 청으로 전달했다. 이렇게 삼국의 학자들은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자신들의 학술 정보를 삼국 내에서 회전시켰다. 특히 금석학 연구의 경우, 각국에 보존된 서로 다른 시기에 제작된 금석물 자료를 모아 동북아시아 문화권의 역사와 서예사의 빈틈을 메운 몇몇 작업은 학술 내용뿐 아니라 삼국 학자들의 학술 협력, 동일한 문화권 학자들의 연대 자체가 돋보이는 작업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금석물의 탁본은 서적처럼 대량으로 제작할 수 없으므로 소수의 학자들이 친분을 통해 공유할 수 있는 자료들이다. 청의 한·일에 대한 연구 자료의 양과 질이 비약한 것도 바로 학자들이 개인적 교류가 가능했던 18세기 후반 이후의 상황에 힘입은 바 클 것이다. 한국의 신라·백제·고구려 삼국의 비석 탁본들, 그리고 일본으로부터 조선을 거쳐 중국으로 전해진 비석 탁본들은 중국으로 전해져 중국 당대 서체를 복원할 중요한 증거 자료가 되어 주었다. 한편 이미 오래전부터 중국의 금석학 관련 서적은 조선으로 유입되어 김정희, 조인영, 이유원 등의 조선 금석학 연구 저술을 도왔다는 것도 분명하다. 그리고 조·청 간 학술 교류는 김정희의 다음 세대에 이르면 더 폭넓은 계층에서 다양한 학술 주제로 확산된다. 김정희를 포함한 19세기 중반 한·중·일 삼국의 수많은 학자들은 자신들이 공유하는 중화 학술계의 주체로서 각 분야에서 학술 자료의 보존과 재생산을 위해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학술 자료의 유통이 너무나 손쉬워진 현재에 150년 전 학자들의 고난과 노력, 성과 속에서 과연 무엇이 학문을 살아있게 하는가 그 중요한 지점은 더욱 분명했다. 김정희와 그 주변인들의 학문적 목표와 자취를 더듬어 보고 부끄러운 연구의 성과를 다시 책으로 내는 것은 그들이 남겨준 지적 유산, 학술 자료를 공유해야 한다는 학자의 기본 소양을 실천하는 것일 뿐이라고 스스로 다독여본다. 이번 책을 내는데도 또 출판 격려부터 시작해 중간중간 글을 읽고 비평을 해주시고 끝까지 살펴주신 분은 유봉학 선생님이시다. 또 1장 원고를 나보다도 꼼꼼히 읽고 샅샅이 문제점을 지적해 주신 김문식 선생님,이 책의 반이 넘는 도판 자료를 전해주시고 도판뿐 아니라 책도 듬뿍 얹어 주시면서 격려해주신 과천 추사박물관의 허홍범 선생님, 어려운 업계의 사정에 불구하고 다시 한 번 출판을 허락하고 아름다운 책을 만들어 주신 신구문화사 여러분께도 큰 감사를 드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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