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방언은 늘 내 곁에 있었다. 누대로 내려온 우리 논밭과 가산이 있는 농촌에서 초등학교 4학년까지 익히 듣던 말이요, 강릉 시내로 전학을 온 후로나 나중 고등학교 2학년부터 서울 생활을 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강릉방언은 늘 고향 산천과도 같이, 고향의 숨결과도 같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대학을 국문학과로 진학하여 국어학을 전공하게 되면서 강릉방언은 언제부터인가 은연중 내게 숙제로 다가왔다. 내 손으로 그 비밀을 캐고 체계를 세워야 하겠다는 것이 무슨 사명처럼 다가왔던 것이다. 대학교 3학년 때 어느 월간 잡지의 방언조사 논문 공모에 응모했던 것도, 그야말로 철모르고 덤볐던 일이나 그 사명감의 한 발로였을 것이다. 그 후 본격적으로 강릉방언에 관한 많은 논문을 썼고, 학위논문 『嶺東 嶺西의 言語分化 - 江原道의 言語地理學』(서울대학교 출판부, 1981)도 강릉방언을 그 중심에 놓고 썼다. 그런데 이렇게 강릉방언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방언사전 편찬을 염두에 두었던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사전을 만드는 일은 학문의 세계가 아니라는 생각이 은연중 도사리고 있었던 듯하다. 아니, 그보다는 도무지 그 엄청나게 들 시간을 낼 길이 없기도 하였을 것이다. 강의 준비도 강의 준비려니와 국어학은 미개척 분야가 많아 그것들을 돌보기에도 시간이 모자랐던 것이다. 퇴임 후 일석(一石) 국어학상을 받는 자리의 답사에서, 앞으로 기회가 되면 ‘인지방언학(Perceptual Dialectology)’이라는 새로운 틀로 방언구획을 시도하는 연구를 해 보고 싶다고 하면서, 그 대상은 역시 강릉방언으로 생각하였으면서도 그 또한 방언사전과는 거리가 먼 분야였다. 그렇던 방언사전 일이 홀연히 내 앞으로 다가왔다. 모든 일은 때가 있다는 것일까.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일찍이 운명으로 점지되어 있었던 것도 같았다. 너무 갑자기, 그러면서도 너무도 확고한 힘으로 나를 옭아맸다. 마침 그때 출간된 강릉방언 사전의 서평(書評)을 의뢰받은 일이 그 단초였다. 얼마나 엉뚱한 것들이 많은지, 이것들이 세상에, 또 후세에 그대로 전해지는 것을 방관하는 것은 내 사명 하나를 저버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니면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 그것이 피할 수 없는 큰 압력으로 다가왔다. 무슨 큰 힘에 이끌리듯 떨치고 나섰다. 그러나 막상 일을 시작하려니 모든 게 낯설었다. 젊은 시절 현지조사를 다니던 때와는 온통 다른 세상이 되어 있었다. 산천이 변해도 몇 번이나 변한 세월이 지나 있었다. 장거리 운전을 하고 차에서 내리면 허리가 펴지지 않아 걸음을 옮기는 일도 자연스럽지 못하였다. 방바닥에 몇 시간을 쭈그리고 앉아 견디는 일도 고역이 아닐 수 없고, 무엇보다 반백(半白)의 대머리 몰골로, 어디 가나 원로 소리를 듣는 신분으로 낯선 곳을 기웃거리는 일부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녹음기도 테이프가 아니라 메모리 카드를 쓰는, 전혀 낯선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나하나 어설프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래도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고 하였던가. 방언조사는 이내 즐거운 일이 되었다. 이제는 순수한 사투리를 구사하는 사람을 만나기 어려울 것으로 걱정하였는데 의외로 좋은 분들이 많았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귀중한 자료들이 앞 다투어 나타나 주어 무슨 보석이라도 캐는 듯한 기쁨에 절로 신명이 나 놀랍게도 젊은 날의 활기가 되살아났다. 방언사전을 목적으로 하는 일은, 겨우 1천여 개의 조사항목으로 만든 질문지를 들고 규칙이나 세우려고 다닐 때와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언어의 숲은, 대삼림(大森林)이라 해야 할까, 넓고도 깊어 사람을 자꾸 빨아들이는 마력이 있었다. 그동안 우리는 화초밭에서만 꽃을 구경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의 숲은 그처럼 단 순하지 않았다. 발을 들여 놓을 때마다 신기하고 풍요로운 광경이 펼쳐져, 그것은, 뭐랄까, 그동안 내가 강릉방언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허황한 일이었는지를 깨달으며 무슨 신천지를 만나는 그런 기분과도 같았다. ‘아주’라는 부사를 왜 그리 자주 쓰는지, 그것이 꾸미는 말이 어디 있기나 한지, 특히 의성의태어에서였지만 새 단어를 만들어 쓰는 능력과 자유가 어디까지인지, 새로운 물음으로 다가왔다. 도치법을 우리는 아주 특수한 어순으로 다루어 왔지만 어찌 보면 그것이 더 정상적인 어순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말을 되도록 길게 늘이고 싶은 것일까, 그래서 되도록 시간을 많이 보내고 싶은 것일까. “어디 가서 누구를 만났다”고 할 것을 “어디를 갔다. 거기를 가 가지고 누구를 만났다”고 푸는 것은 간단한 경우고, “어디를, 거기가 어떤 곳인데, 거기를 가 가지고, 누구를, 그 사람은 누구의 누구인데” 식으로 삽입절이 수시로 들어갔다. 남의 말의 인용도 간접화법으로 하지 않고 거의 직접화법으로 하였다. “저저”니 “머”니 “인재”니 등 군소리라 할 것들은 또 왜 그리 자주 쓰는지. 억양도 어떤 의문문일 때는 문장 끝을 올리고 어떤 의문문일 때는 평서문과 같다는 식의 간단한 체계가 아니었다. 이야기 중에 감정의 기복이 커서 말끝을 유난히 길게 빼기도 하고, 뒤끝을 높이는 경우도 몇 가지 다른 방식으로 올리는가 하면, 어느 음절을 유난히 크게, 또는 강하게 발음하는 등, 한마디로 생기발랄하였다. 민속(民俗) 분야에서도 그 간단한 ‘지게’를 만드는 과정만 하여도 그들만의 지혜가 번득이는 새로운 세계가 있었고, 도리깨 하나를 만들어도 아무 나무로나 만드는 것이 아니어서, 부위에 따라 다른 종류의 나무를 쓰되 곡식을 두드리는 부위인 도리깻열은 그 끝이 특별히 생긴 것을 골라 쓰는가 하면 그 세 개 중 가운데 것은 좀 짧게 하는, 다른 지방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방식으로 하였다. ‘감재떡’의 재료인 가루를 만들기 위해 감자를 썩히는 과정도 인고(忍苦)의 길고 긴 과정이 있었고, ‘큰떡’은 언제 누구에게 보내기 위해, 무슨 떡들을 어떤 크기, 어떤 배열로 담는지, 할머니 들이 흔히 하는 말이 “옛날엔 법이 많었어요. 시방 머 법이 있소”였는데 그야말로 엄격한 법이 있었다. 애초 아담한 어휘집 하나를 꾸려 보겠다던 때엔 상상도 못하던 엄청난 세계들이 끝없이 나타났다. 방언사전이 단순히 어휘사전만일 수는 없었다. 야성(野性)이랄까, 이런 것들을 되도록 다듬지 않은 상태로 최대한 살리고 싶었다. 화살표 같은 기호를 동원하여 운율자질(韻律資質)들도 가능한 한 세분하여 표시하고, 특히 음장(音長)과 성조(聲調)는 예문에까지 철저히 넣어 구어사전(口語辭典)의 면모를 갖추고자 하였으며, 민속적인 내용도 예문의 길이에 제약을 두지 않고 세세히 담고자 하였다. 예문의 길이는 어휘적 특징을 보이는 데 그치지 않고 통사론, 나아가서는 화용론적인 특징을 보이기 위해서도 길어졌다. 제명(題名)에 ‘자료’를 넣은 것은 이런 자료적 가치를 부각시키고자 함이었다. 이 일에 파묻혔던 지난 10년을 돌이켜보면 모든 게 행운의 연속이었다. 모든 게 너무나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신기할 정도로 좋은 분들이 때를 맞추어 나타나 주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흔들림 없이 오롯이 고향말을 보존하고 있는, 그러면서도 언어 감각이 뛰어난 분들이 그때그때 나타난 일은 하늘이 내린 은총이라고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한 개인의 어휘력이 그렇게 대단할 수도 있다는 발견은 그 자체로 기쁨이기도 했다. 거기엔 까맣게 잊혀 가던 따스한 고향말이 있었고, 새 가족과 같은 풋풋한 인심 들이 있었다. 이 세상에 어찌 아직도 그리 순후(淳厚)한 인심들이 살아 있는지. 다시 찾아가면 왜 이리 오랜만에 왔느냐고 반겨 주고, 특식을 해 주는가 하면, 올 때는 또 강낭콩을 따 준다, 옥수수를 따 준다, 말린 미역을 준다 하며, 이건 뭐 조사를 다니는 게 아니라 대접 받으러 다니는 게 아닌가 싶게, 나를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100세가 넘으신 할아버지는 한번은 밤나무 밑에서 주었다며 조끼 주머니에서 밤톨을 몇 개 주시더니, 한번은 달걀 두 개를 삶아 소금까지 봉지에 싸서 먹으라고 주었다. 방언자료들이 하나하나 보석 같이 소중하였지만 이 좋은 기억들을 내 어찌 소중히 간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도무지 그럴 나이가 아닌데 이런 일을 시작했다고 하니 국립국어원, 강릉시, 강원일보, 조선일보, KBS 등 여러 기관에서 관심과 성원을 보내 주었고, 가까이 지내며 매주 한 차례씩 만나는 고향 친구들은 처음 일을 시작할 때부터, 이명원 형은 자기 누님을 찾아가라, 주영명 형은 자기 숙모님을 찾아가라 하면서 길을 열어 주더니, 나중 김항래, 조인학 두 형은 교정 일에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큰 힘을 보태 주었다. 교정 일에는 또 이제 다 학계의 중견이 된 박경래, 장소원, 김명운, 이홍식, 이은경, 임동훈, 노명희, 양명희, 이호승, 이정복, 박진호 교수 등 여러 제자들이 합심하여 젊은 식견으로 이것저것 허술했던 부분을 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신구문화사 최승복 부장은 까다롭기 이를 데 없는 사전 편찬 작업에 시작부터 마무 리 단계까지 이모조모로 빈틈없는 정성을 쏟아 주었다. 고마운 말을 어떻게 다 표현할 길이 없다. 마무리를 하면서 보니 역시 나이의 한계가 여기저기서 드러나지만 나로서는 길지 않은 기간 이만한 자료가 모여, 자칫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들이 이제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는 것에 스스로 벅차하고 있다. 10년이 지나는 사이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분들 중 반 가까이 유명(幽明)을 달리하셨다. 어찌 보면, 서산으로 막 넘어가려는 것을, 넘어가고 나면 다시 찾을 길이 없는 것을, 그 해를 쫓아가며, 조금이라도 더 높은 봉우리로 올라가면서 하나라도 더 사진으로 담으려고 한, 안간힘을 쏟은 기록들이다. 그동안 아프던 허리며 무릎도 잘 참아 주고, 또 눈도 끝까지 어두워지지 않고 귀도 계속 밝아 준 일이 무엇보다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고마운 일은 좋은 고향을 가졌다는 일일 것이다. 좋은 고향이기에 하는 일이 늘 신명나고 즐거움에 차 있었을 것이다. 좋은 고향을 위해 일 하나를 마치게 된 일이 고맙고,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해 준 모두에게 감사한다. 2022년 1월 15일 팔십오수 이익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