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하얀 겨울에 하늘빛을 닮은 조그마한 꽃이 유난히 눈길을 끌었습니다. 살아오면서 무심하게 스친 꽃들은 셀 수도 없었겠지만 ‘이 꽃 이름이 무얼까?’ 하는 진한 호기심이 일었던 만남은 처음이었습니다. 작은 야생화 도감을 사서 알아낸 그 풀의 이름은 큰개불알풀이었습니다. 약간은 기이하게 들렸던 그 이름이 다른 풀과 나무들의 이름을 익히는 재미에 빠져들게 했습니다. 전에는 몰랐던 풀과 나무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들은 친구가 되었고, 저마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소년 시절에는 제대로 의미를 몰랐던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를 식물이름 공부를 하면서 비로소 실감하였습니다. 식물들을 찾아다니는 길에서 많은 꽃벗들을 만났고 즐거움을 함께하였습니다. 뜻밖에 만난 귀한 식물, 고생 끝에 찾아낸 풀과 나무, 별나게 생긴 꽃, 사라져가는 안타까운 종 등등에 대한 이야기는 끝이 없었고 동호인들과의 유대도 깊어갔습니다. 그러한 식물들에 열광한 벗들과 여러 고산준령과 심산유곡은 물론, 제주도, 울릉도, 대청도 등지를 탐사하며 즐거운 추억을 쌓았고 북녘 땅에 자라고 있을 식물들에 대한 갈증을 달래기 위해 백두산과 동북아시아 일원까지도 여러 차례 둘러보았습니다. 그렇게 십여 년이 지난 즈음에는 산과 들에서 만나는 식물들의 이름을 거의 익히게 되었습니다. 식물들이 살아가는 모습 자체로도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그 이름을 알고 만날 때는 더 흥미롭고 진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름은 한 식물의 정체성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옛사람들의 삶에 어떻게 수용되었는지도 엿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전설이 이름을 낳기도 하고 이름이 전설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식물이름 공부에서 아쉬웠던 점은 식물명의 유래에 대하여 공감하고 신뢰할 수 있는 자료의 빈곤이었습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미심쩍은 유래설에 꽃벗들이 의아해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근대식물분류학이 도입된 이후에 새로 발견되어 붙여진 이름들은 불합리하거나 무성의하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기존의 유래설과는 다른 생각과 사리에 맞지 않은 작명에 대한 단상을 한 토막씩 동호회의 홈페이지에 게재하였더니 뜻밖의 호응과 격려를 받아 『꽃들이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라는 책을 내게 되었습니다. 부르기 쉽게 ‘꽃나들이’로 회자되는 연작 1, 2, 3권을 통하여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초본 1,300여 종의 이름을 주제로 나름의 소견이나 느낌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꽃에 대한 민족 고유의 정서를 오롯이 품고 있는 아름다운 이름이 있는가 하면 이웃나라의 꽃이름을 무성의하게 베낀 듯한 이름이라든가 식물의 근연관계를 헷갈리게 하는 이름, 상식을 벗어난 이름도 많았습니다. 그러한 이름들에서 느꼈던 감탄과 안타까움을 글로 옮겨보는 작업도 무척 보람이 있었습니다. 꽃나들이 4, 5권에서는 나무 이야기를 다루었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육지에서는 보기 어려운 식물들의 탐사를 위해 제주도에 머물렀던 연유로 이태 전에 꽃나들이 5권, ‘남녘 나무에 피는 꽃’을 먼저 출간하였습니다. 이번에 내는 4권, ‘나무에서 피는 꽃’은 남해안과 제주 지방을 제외한 한반도의 대부분 지역에 분포하는 나무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기왕에 시작한 시리즈의 제목이 ‘어디 어디에서 피는 꽃’이라고 운을 뗀지라, 나무보다 꽃이 주제처럼 보이는 ‘나무에서 피는 꽃’이라는 부제는 독자 제현들께서 해량하시리라 믿습니다. 나무들의 이름은 풀들의 이름에 비해 어떤 거부감이랄까 아쉬움이 덜하였습니다. 새로운 변종들이 계속 발견되어 어설픈 접두사를 달고 발표되는 풀 이름과는 달리 나무의 이름은 대다수가 귀에 익은 때문인 듯합니다. 나무들은 풀들에 비해 훨씬 크기 때문에 옛날부터 충분히 인지되었으므로 새로운 종의 발견과 그에 수반되는 작명이 적었을 거라는 추측을 해 보았습니다. 풀꽃들의 이야기를 쓴 책에서는 그 이름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한 내용이 많았다면 나무 이야기에서는 오랜 연륜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일이 즐거웠습니다. 이렇게 출간한 연작 『꽃들이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 다섯 권과 『제주도 꽃나들이』, 『백두산 꽃나들이』를 합하여 어느덧 일곱 권의 책을 내게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니 식물에 대해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아마추어가 함부로 저지른 부끄럽고도 외람된 일이었습니다. 무모하기 짝이 없는 소행을 격려해주고 도와주신 많은 분들 덕분에 이 책들을 낼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 책이 ‘꽃나들이’ 시리즈의 마지막이 될 듯도 해서 이 자리를 빌어 그동안 크나큰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우선 어설프기 짝이 없는 원고를 꼼꼼하게 살펴주시고 조언해주신 우계 이상옥(友溪 李相沃) 선생님과 모산 이익섭(茅山 李翊燮) 선생님께 깊이 감사합니다. 비단 이 책에 대한 격려와 조언뿐만 아니라 직접 꽃들을 탐사하셨던 소회를 책으로 낸 우계 선생님의 『가을 봄 여름 없이』와 모산 선생님의『(꽃길 따라 거니는) 우리말 산책』 등 여러 글들에서도 귀한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출판업계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수년 동안 졸저(拙著), 꽃나들이 시리즈를 출판해주신 신구문화사 임미영 사장님과 최승복 부장님께 대한 고마움도 말로 다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절친한 꽃벗이자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아끼지 않은 학교법인 신구학원 이사 김광섭 님께도 이 지면을 빌어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아울러 어설픈 글을 즐거이 읽어주고 갈채를 보내준 ‘자연을 사랑하는 모임, 인디카(indica)’의 꽃벗들에게 감사합니다. 인디카의 많은 분들로부터 식물에 관한 정보와 귀한 사진들을 얻을 수 없었더라면 이 책들을 낼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 꽃벗들과 산과 들을 누비며 나누었던 행복한 시간들도 오래오래 간직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수년 동안 제주도와 영덕의 고향집에서 탐구와 집필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아내와 자녀들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고향집에 기거하는 동안에는 연로하신 부모님과 뒷바라지를 해준 동생에게 짐이 되지나 않았는지 송구하고 미안할 따름입니다. 이 책은 사실 꽃 이야기를 빙자한 자서전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향을 떠나 산업화와 정보화의 소용돌이를 헤쳐 나가는 동안 소원(疏遠)해졌던 풀과 나무들을 다시 만났을 때 새록새록 떠오른 아름다운 추억이 많았습니다. 두메산골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을 이제는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나날들로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언젠가 나의 손자 손녀들이 이 옛이야기를 한 번쯤 읽어보리라는 기대를 감추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았던 시대를 기억해달라는 바람보다는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작은 징검다리를 남기고 싶었습니다. 어쩌면 자연과 더 멀어질는지도 모를 다음 세대들이 나무와 풀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 작은 행복을 찾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022. 8. 영덕 고향집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