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치치암일록
이미지

ㆍ분 야

: 역사/민속

ㆍ저자

: 이규대 역

ㆍ발행일

: 2018. 11. 15

ㆍ크기

: 신국판

ㆍ정가

: 18,000

ㆍ쪽수

: 464

ㆍISBN

: 978-89-7668-245-1

차례
설명
■ 출판사 서평

'치치암일록' 일기책의 주인공은 김현호(金玄昊)라는 강릉지방 거성인 강릉김씨 부정공파의 후예이며, 18세기 후반 영·정조 시대를 강릉지방에서 생활한 유학(幼學) 신분을 갖은 유생(儒生)이다. 이 일기를 통해서 조선후기 강릉지방의 관혼상제를 비롯해 마을·문중·사림의 공동체 생활 모습, 농·어업과 장시의 생산과 유통과 소비 활동, 그리고 향교의 교육 활동과 백일장과 과거시험의 전개양상, 교통의 실태와 여행과 풍류, 질병과 그 예방 및 치료 실태, 사계절과 명절의 생활풍속, 언어생활 등 역동적이고 다채로운 사회상을 책에서 볼 수 있다.

■ 저자소개

이규대

강릉교육대학과 관동대학교 역사교육과 졸업
중앙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현재 강릉원주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

논저

「강릉단오제의 형성과 전개」
『영동지방 향토사연구 자료총서』(공저)
『조선후기 향약연구』(공저)
『강릉단오제의 전승과 비전(공저)』
『조선시기 향촌사회 연구』
『강릉단오제의 사회사 연구』

■ 책속에서

『치치암일록』 권4.
매곡(梅谷)에 있을 때의 일록(日錄) 나이 31세

신해년(辛亥年 : 1791, 정조 15) 정월(正月) 병자삭(丙子朔)

초1일, 병자(丙子) 청명하며 바람이 없었으나, 오후에 바람이 약간 불었다.
작년 가을에 크게 풍작이었기에, 쌀값이 1석에 120여 동(銅)에 이르렀다. 비록 품팔이꾼들이라 하더라도 조금도 굶는 자가 없으며, 더욱이 촘촘히 밀집한 마을에서 근심하는 이웃은 보이지 않는 듯하다. 족히 예전에는 보기 드문 낙세(樂歲)라고 할 만하다. 나는 신촌(新村)에서 여러 댁에 두루 세배를 다녔다. 오후에 집으로 돌아 와 마을의 친구들과 밤늦도록 놀았다.

초2일, 조금 추웠고 또 약간의 바람이 있었다.
나는 매곡(梅谷)의 여러 댁과 송림촌(松林村)을 두루 방문하고, 돌아와 서숙(書塾)에서 인시(寅時: 3∼5시)까지 머물렀다. 입춘(立春)이었다.

초3일, 맑고 평온하였다.
마을 아이(兒曹)들에게 술과 안주를 준비시키고 북을 치고 춤을 추며 밤늦도록 놀았다. 여기에 모인 자들은 48인에 이르렀다.

초4일, 아침부터 음산하게 구름이 끼었다.
최정묵(崔正黙)의 초례(醮禮)1) 날이라 나는 찾아가서 떠나보냈다. 그리고 구남(龜南)을 넘어 함 씨 마을을 방문하여 김 생원의 집에 세배하였고, 곧바로 초시(草柴)에 도착했는데 길에서 풍설(風雪)을 만났다. 최군(崔君) 등과 더불어 송림(松林) 마을에서 잠시 쉬었다가 저녁에 집에 돌아왔다.

초5일, 맑았다.
여러 친구들과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초6일,
최여온(崔汝溫)의 증조할머니 기일이다. 나는 아침 전에 세 사람의 동료들과 (이하 원본이 명확하지 않다).

초7일, 바람이 없고 따뜻하여 조금은 봄기운을 느꼈다.
나는 초시(草柴)로부터 곧장 강여서(姜汝瑞) 상인(喪人)의 장산(葬山)으로 가서 신주(神主)를 썼다. 정오 즈음에 집에 돌아와서 최성심(崔聖心)을 문병하였다.

초8일, 온화했다.
나는 여러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난계(亂鷄)에 이르렀다.

초9일, 음산하고 추워서 자못 눈이 내릴 것 같았다.
나는 강(姜) 상인(喪人)을 방문하였는데 고운거(高雲擧)의 어머니가 지난밤에 별세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즉시 찾아가서 위로하였다. 이어서 매죽헌(梅竹軒) 주인 최광백(崔光伯)을 찾아갔는데, 모름지기 엎드려서 신음을 하고 있었다. 어두워질 무렵에 눈을 맞으면서 돌아왔다.

초10일, 바람기가 조금 추워졌다.
최정묵(崔正黙)이 부인을 맞이하여 돌아왔다. 나는 연회에 참석하였다가 저녁때가 되어 돌아왔다.

11일, 조금 따뜻해졌다.
나는 여온(汝溫)의 집에 머물렀다.

12일,
가친(家親)이 새말(新村)에서 오셨다. 밤에 장산(長山) 최(崔) 어른이 오셔서 서숙(書塾)에서 담소를 나누었다.

13일, 바람이 햇살에 누그러져 조금도 추운 기운이 없다.
여온(汝溫)이 여동생의 혼례를 행하였는데, 온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14일, 조금 추웠다. 학구
나는 공부하는 자들과 함께 읍내(邑)로 나갔는데, 내일이 봄맞이 백일장(春接白場)이었기 때문이었다. (원본이 부분 결실) 심(沈) 도사(都事) 댁을 방문하고, 또 교동(校洞)에 김(金) 상인(喪人)을 위문하였다. 엷게 어둠이 내릴 무렵 권복동(權福東) 댁에서 저녁 식사를 하였다. 밤에는 수령(主倅)과 더불어서 함께 담소를 나누다가 물러나와 광백(光伯) 형과 더불어서 동숙하였다. 밤에 조금 눈이 내렸다.

15일, 아침에 일어나 눈을 보니 무릎을 넘을 정도였다.
수령이 저녁 무렵에 과장을 설치하고 사율제(四律題)를 게시하였다. 제목은 즉 춘상후월(春上候月)이었고, 운자(韻字)는 춘자(春字)에 압(押)을 하였다. 다른 글자는 즉 자기 뜻대로 하도록 매달았다. 나는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今節人間第一春 지금 절기 인간세상 제일의 봄이요,
금절인간제일춘
爭言農候驗銀輪 다투는 듯 호령은 농절에 은륜을 징험하네,
쟁언농후험은륜
三千界外光初湧 삼천 경계 밖에 빛이 처음 솟으니,
삼천계외광초용
十二圓中影㝡新 십이원에서 중영이 가장 새롭네,
십이원중영최신
鮫綺戱靑呈瑞彩 교룡 비단이 푸름을 희롱하니 상서로운 채색을 바치고,
교기희청정서채
蠙珠凝白洗纖塶 진주가 흰 색으로 엉기어 작은 땅을 씻고,
빈주응백세섬록
若今先見先生子 만약 이제 먼저 본다면 생자가 먼저이니,
약금선견선생자
近水家家慶福均 물가 집집이 복이 고르니 경사이로다.
근수가가경복균

시가 졸작이라 방에 들지 못하였으니 가히 한탄스러울 뿐이다. (원본 부분
결손)

16일, 새벽부터 대설이 내렸다.
나는 동접(同接)들과 더불어서 눈을 무릅쓰고 왔는데 북풍이 매우 심하였다. 이날은 우수(雨水)이다.

17일, 날이 개었다.
나는 이틀 밤을 집에 있었으나 달을 보지 못했는데, 오늘 밤에 비로소 보았다.

■ 머리말

『치치암일록(癡癡菴日錄)』 해제

이 일기책은 『치치암일록』으로 명명되었다. 어리석을 치(癡)자를 반복하여 ‘치치암’이라 한 것은 작자의 겸양의 소치일 것이며, 작자의 아호(雅號)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이 책은 2권 1책으로 가로 17cm, 세로 26.5cm의 규격에 353쪽의 분량이며, 오른쪽에 다섯 구멍을 뚫어 실로 묶은 수서본(手書本)이다.
이 책의 편제는 두 쪽이 일기이고 이어서 두 쪽은 『구운몽(九雲夢)』 내용이다. 이렇게 반복적으로 편제되었으니 전체 분량의 절반은 일기이고, 또 절반은 『구운몽』이다. 이로써 일기의 분량은 173쪽이 된다. 이러한 양상은 당초부터 편집된 것은 아니었다고 보여진다. 처음에는 종이를 반으로 접어서 일기를 썼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후 어느 시점에 반으로 접은 부분을 타개어서 『구운몽』의 내용을 전사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로써 현재와 같은 양상의 편제가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이 일기책의 내용은 본문에서 권4와 권5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파악된다. 이 점은 권1, 권2, 권3이 존재했음을 시사한다. 다만 일기의 권1~권3에 해당되는 부분은 지금까지 발견되지 못한 실정이다. 현전하는 일기책이 후손들에 의해 전승되어 온 것으로 보면, 그 전승과정에서 소실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기의 주인공은 김현호(金玄昊)이다. 이 사실은 과거시험인 전시(殿試)에서 임금을 면대하면서 작자가 자신을 소개하는 글에서 파악된다. 그는 강릉지방 거성인 강릉김씨이며, 부정공파(副正公派)의 파조(派祖)인 보진재(葆眞齊) 김담(金譚, 1522~1605)의 8대손이 된다. 그는 1761년(영조 37)에 출생하여 1794년(정조 18)까지 34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 일기는 그가 31살 되던 해인 1791년(정조 15)부터 시작되어, 그가 생을 마감하기까지의 4년 동안의 일기이다.
족보 『강릉김씨부정공파보』에서 그는 조부 체규(軆圭)-부 성락(聲樂)을 잇는 계자(系子)였으며, 그의 아들 역시 양자로 동주(東周)이다. 그리고 그의 생부는 성정(聲正)이었다. 이렇듯 족보상에서 파악되는 내용은 비록 매우 간략하지만, 그가 양자로 영입된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은 이 일기의 전체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관건이 되고 있다.
일기의 내용상에서 파악되는 그의 친가는 강릉의 신촌(新村) 즉 새말이요 지금의 주문진이다. 그리고 그 자신은 분가하여 연곡면(連谷面) 매곡(梅谷)에서 생활하였고, 그의 생모는 연곡면에서 거주하다가 사촌(沙村) 즉 사천면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일기에서 후반 2년은 이주하여 고성 이북면(二北面) 계촌(桂村)에서 생활을 하였다. 이렇게 주거지를 고성으로 옮긴 데에는 이곳에도 종인들이 거주하고 있기도 하였지만, 본인의 지병을 치료하려는 피접이라는 성격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 일기의 내용은 강릉-양양-간성-고성 등 영동지방 해안가 도시를 연결하는 교통과 여정을 비롯한 생활상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으며, 또한 30대 유생의 과거와 사림 및 문중활동을 위해 강릉과 강원감영이 있는 원주, 강릉과 인제, 강릉과 서울 등 영동과 영서를 연결하는 교통과 여정을 비롯한 생활상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
끝으로 이번 번역에서 인명·지명·관직명·질병명 등을 비롯해 각종 고유명사는 괄호 안에 한자를 병기하였으며, 역사용어나 고어(古語) 등은 각주를 달아 해설하였다. 그리고 번역서의 뒤편에 수록한 원본은 일기 편만을 수록하였고, 『구운몽』의 내용은 제외하였다. 이 작업은 일기의 글자체를 보다 선명하게 보이게 하려는 의도였음을 밝혀둔다.